[부록 1] 조선 초기 수없이 왜곡, 개찬한 고려사의 흔적

*태조 4년: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과 정당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 등이 전조(前朝)의 태조(太朝)로부터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37권의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여 바쳤다. (국역 조선왕조실록 이하 동일)

*태종 4년: 하윤(河崙)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고려 관제(官制)를 《고려사(高麗史)》에서 상고하게 하였다.

*태종 14년: 영춘추관사 하윤을 불러 《고려사》를 다시 찬정하게 하다. 하윤·남재·이숙번·변계량에게 《고려사》를 개수하게 하다. 태종 16년 하륜이 죽어 뜻을 못 이룸.

*《고려사(高麗史)》에 공민왕(恭愍王) 이하의 사적은 정도전(鄭道傳)이 들은 바로써 더 쓰고 깎고 하여, 사신(史臣)의 본 초고(草稿)와 같지 않은 곳이 매우 많으니, 어찌 뒷세상에 미쁘게 전할 수 있으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정도전이 임의로 왜곡한 것을 세종이 미워하니 변계량과 정초가 “만약 끊어지고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면, 뒷세상에서 누가 전하께서 정도전이 직필(直筆)을 증손(增損)한 것을 미워하신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고쳐 짓도록 하소서.” 하였다.

* 세종 1년: 윤회에게 《고려사》를 개수해야 함을 말하다. 유관·변계량 등에게 《고려사》의 개수를 명하다

*세종 3년: 이전에 정도전(鄭道傳)이 편찬한 《고려사(高麗史)》가 간혹 사신(史臣)이 본래 초(草)한 것과 같지 아니한 곳이 있고, 또 제(制)니, 칙(勅)이니 하는 말과 태자(太子)라고 한 것 등의 유가 참람되고 분수에 넘치는 말이 된다 하여, 유관(柳觀)과 변계량에게 명하여 교정하게 하였더니, 이제 와서 편찬이 완성되었으므로 이에 헌상해 올렸다.

*세종 5년: 지관사 유관·동지관사 윤회에게 고려사를 개수케 하다

*세종 6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윤회(尹淮)가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를 올렸는데, 이성계 태종의 사대사상을 이어받은 세종의 사대주의 사상이 다음과 같이 잘 드러나 있다. "종(宗)을 고쳐서 왕(王)이라 하였고, 절일(節日)을 생일(生日)이라 하였고, 조서(詔書)를 교서(敎書)라 하였고, 사(赦)를 유(宥)라 하였고, 태후(太后)를 태비(太妃)라 말하였고, 태자를 세자라 말한 것 같은 유(類)는 다시 당시의 실록 옛 문귀를 좇았으니".....와 같다.

그 서문(序文)에 말하기를,

“역사의 법은 옛부터 있었다. 당나라와 우나라 적부터 이미 그러하였으니, 여러 서책을 살펴보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열국(列國)의 사관이 각기 그 때의 일을 기록하여, 뒤에 편찬 기술하는 자가 상고할 수 있게 되었다.

저 한고조(漢高祖) 같은 이는 관중(關中)에 들어가면서 소하(蕭何)를 시켜서 진(秦)나라의 문적(文籍)을 거두게 하였고, 당나라 태종은 위에 오르자 위징(魏徵)을 명하여 수(隋)나라의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니,

전 세상의 쇠하고 흥한 연고를 거울삼아 뒷 임금의 착하고 악한 것을 본받고 반성하게 함이니, 이른바 나라는 가히 멸망시켜도 역사는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이 어찌 참말이 아닌가.

공경히 생각하면 우리 태조께서 개국한 처음에 즉시로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과 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에게 명하시어 《고려국사》를 편찬하게 하시니, 이에 각 왕의 《실록》과 검교 시중(檢校侍中) 문인공(文仁公) 민지(閔漬)의 《강목(綱目)》과 시중(侍中)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과 시중(侍中)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을 채집하여 모아서 편집하여,

좌씨(左氏)의 편년체(編年體)에 모방하여 3년 만에 37권이 성취되었으나, 살펴보건대, 그 역사가 잘못된 것이 꽤 많았으니 범례(凡例) 같은 데에 있어 원종(元宗) 이상은 일이 많이 참람되었다 하여 간간이 추후로 개정한 것이 있었더니, 우리 주상 전하께서 총명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시어 고전과 서적에 뜻을 두셨으므로,

이에 우의정 신(臣) 유관(柳觀)과 예문학 대제학 신 변계량과 신 윤회 등에게 명하시어 거듭 교정하고 개정하여 그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라 하시니, 영락 21년 11월 28일에 신 관(觀)이 말씀을 올리기를,

‘전조(前朝)에 태조로부터 내려오면서 모두 종(宗)이라 칭한 것은 참람한 일이었으나, 혜종(惠宗)·정종(定宗)이 모두 묘호(廟號)였는데, 이제 새 역사에는 혜왕이라 정왕이라 개칭(改稱)하여 묘호로써 시호(諡號)인 것처럼 만들어 진실을 잃은 것 같사오니,

실록에 따라 태조는 신성왕(神聖王)이라 하고, 혜종은 의공왕(義恭王)이라 하고, 정종 이하도 모두 본래의 시호를 쓰게 하면 거의 사실(事實)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 하겠나이다.’ 하였더니, 이 날에 신 회(淮)가 경연(經筵)에 입시하였을 때에 친히 옥음(玉音)을 받자왔으니, 말씀하기를,

‘공자의 《춘추(春秋)》는 남면(南面)하는 권리에 부탁하여 한 임금의 법칙을 이루려고 하였던 까닭으로, 오(吳)·초(楚)에 참람하여 왕이라 한 것을 깎아서 자(子)라 하고, 성풍(成風)을 봉(풧)으로 장사하게 한 것에는 왕을 말할 때 천왕이라 하지 아니하였으니,

붓으로 깎아내리고 빼앗는 것은 성인의 마음에서 재정(裁定)하였으나, 좌씨(左氏)가 전(傳)을 짓는데 이르러서는 오나라·초나라와 월나라에 한결같이 왕이라 자칭(自稱)한 것을 좇아 왕이라고 써서 일찍이 고친 것이 없었고,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비록 말하기는 《춘추》의 서법(書法)을 본받았다고 하나, 그 분주(分註)에는 참람하고 거짓된 나라이나 도적질하여 표절(剽竊)한 명호(名號)라도 모두 그 사실대로 좇아 기록하였으니, 어찌 기사(記事)의 범례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한다.

이제 붓을 잡은 자가 성인(聖人)의 붓으로 깎는 본뜻을 엿보아 알지 못하였은즉, 다만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그대로 쓰면, 칭찬하고 깎아내린 것이 자연히 나타나 족히 후세에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반드시 전대(前代)의 임금을 위하여 그 사실을 엄폐하려고 경솔히 추후로 고쳐 그 진실을 잃게 할 수 없을지니,

그 종이라 한 것을 고쳐 왕이라 한 것은 가히 실록에 따라 묘호(廟號)와 시호(諡號)의 사실을 없애지 말라. 범례를 고친 것은 이것으로 표준을 삼으라.’ 하시니, 신 등이 공경하여 명철하신 명령을 받고 드디어 원종(元宗) 이상의 실록을 가지고 새 역사와 비교하여 종(宗)을 고쳐서 왕(王)이라 하였고, 절일(節日:임금 생일)을 생일(生日)이라 하였고, 조서(詔書)를 교서(敎書)라 하였고, 사(赦)를 유(宥)라 하였고, 태후(太后)를 태비(太妃)라 말하였고, 태자를 세자라 말한 것 같은 유(類)는 다시 당시의 실록 옛 문귀를 좇았으니, 편찬하기를 이미 끝내매, 사적(事跡)이 대강 완전하여 책을 펴면 권(勸)하고 징계(懲戒)하는 것이 분명하게 여기에 있는지라,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마자장(司馬子長)이 세상을 초월하는 기개로 석실(石室)의 글을 뒤져서 《사기(史記)》 1백 30편(篇)을 편찬하였는데, 누를 것은 누르고, 높일 것은 높이고, 버리고 취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나, 반드시 저소손(?少孫)이 그 빠진 것을 첨부하고, 사마정(司馬貞)이 그 잘못된 것을 구(救)해 준 뒤에 그 역사가 완비되었으니, 자장(子長)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그 아래 되는 자로서 어찌 깎아 바르게 하고 잘못을 고칠 자에게 기대함이 없겠는가. 역사를 짓는 것의 어려움과 교열하고 교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으니, 전하의 생각하심이 깊으신지라, 면대(面對)하여 명령하심은 어의(御意)의 독단(獨斷)에서 나왔으니,

명백하고 정대(正大)함이 보통 천박한 소견(所見)으로는 그 가[涯]와 끝을 측량하지 못할 것이라. 삼가 손을 잡아 머리를 조아리고 붓을 들어 글로 써서 책머리에 실어서, 뒤의 군자로서 이것을 읽는 자에게 고하노니 마땅히 자세하게 생각하라.” 하였으니,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윤회(尹淮)가 지은 것이다.

*세종 7년: 윤회가 지은 서문은 쓰지 않고 우선 계량의 말에 좇도록 하겠다.

*세종 12년:“최 도통사(崔都統使)는 공민왕 때에 있어 큰 공로가 있었다 하는데 사실인가.”하니,

순이 아뢰기를, “최영(崔瑩)이 군대를 거느리고 탐라를 정벌하였고, 현릉(玄陵)이 죽은 뒤에 왕씨(王氏)의 혈통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도 당시의 재상은 영을 두려워하여 신우(辛禑)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영이 돌아와서 신우를 세운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었으나, 벌써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감히 바꾸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영은 의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대의를 들고 나와서 우(禑)를 쫓아내고 왕씨를 세웠으면 어떻겠는가.” 하니,

순(循)이 대답하기를, “우가 벌써 서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뒤에는 또 요를 공격하는 일을 일으켰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색(李穡)도 여러 번 죄를 주기를 청하는 탄핵을 받았는데, 어찌하여 의리를 아는 학자로서 신씨(辛氏)에게 아부하였는가. ‘누구를 임금으로 세워야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선왕(先王)의 아들이 있다.’고 하였으니, 우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왕씨(王氏)를 세우지 않고 우를 세운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혹은 우리 태조(太祖)께서 일어나실 줄을 알고 일부러 우를 세운 것이 아니었을까.” 하니,

순이 대답하기를, “태조께서 개국(開國)하신 것은 곧 회군(回軍)한 뒤의 일이요, 그 때에는 임금 노릇하시려는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어째서 우를 세웠을까. 왕씨의 직계 혈통으로는 누가 있었는가.” 하니,

순이 아뢰기를, “직계 혈통에서는 후손이 없었고, 다만 공양왕(恭讓王)이 있었을 뿐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현릉(玄陵)은 어째서 신돈(辛旽)의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아서 임금의 자리에 세우고 왕씨의 혈통을 끊어버리려 하였을까. 옛적에, ‘차라리 다른 성을 세울지언정 같은 성은 세우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뜻과 마찬가지로다.”

*세종 14년:《고려사(高麗史)》를 보고 춘추관(春秋館)에 전지하기를, "편년의 필법으로 이를 수찬(修撰)하여, 차라리 번거로운 데에 실수가 있더라도 소략하여 사실을 빠뜨리지 말게 하라.”

*세종 20년: 경연에 나아가 《고려사》의 체재에 대해 논의하다. 춘추관에서 신우·폐왕 우·폐왕 창으로 할 것을 아뢰다

*세종 31년: 기·전·표·지로 개찬(改撰)하기를 명하였다.

*문종 1년: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김종서(金宗瑞) 등이 새로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를 바치니,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으로 되어 있었다.

"그 범례(凡例)는 모두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법 받았으며, 대의(大義)에 있어서는 모조리 성재(聖裁)에 품신(稟申)하였습니다. 본기(本紀)를 피하고 세가(世家)로 한 것은 명분(名分)의 중함을 보인 것이요, 위조(僞朝)의 신씨(辛氏)를 낮추어 열전(列傳)에 넣은 것은 참절(僭竊)에 대한 형벌을 엄하게 한 것입니다."라 했으니

사기를 본받은 것이나 우리 역사를 본기라 말 못하고 세가라 한 것 등 위서 논쟁은 그만두고도 고려사는 서문부터 사대주의 사상이 흠뻑 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