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술과 강의


선생은 부산의 동양의학전문학원에서부터 많은 이들을 상대로 한의학 강의를 시작했었다. 그 때에도 이미 여러 사람으로부터 강의가 조리 있고 내용이 좋아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56년에 서울 인사동으로 와서 韓東錫漢醫院을 운영하고 주위의 사람들과 교류하면서도 강의를 하게 되었다. 주로 內經과 內經 運氣篇, 周易, 本草 등을 강의하였으며 학생, 한의사, 일반 지식인 등이 와서 선생의 강의를 들었다. 1960년에 동양의대 교수가 되고 난 후에도 야간 시간대에 있었던 한의원 2층에서의 강론은 계속 되었다.


  선생의 말투는 보통 속도에 함경도 사투리는 쓰지 않았고, 설명할 때는 말을 풀어 자세히 해 주었다. 부산 동양의학전문학원에서 강의할 때에도 배우려고 모인 사람들이 각처 사람들이다 보니 그 사람들이 혹 선생의 함경도 사투리를 못 알아들으면 다시 풀어서 설명해서 이해시키곤 했다. 그러나 경우에 맞지 않거나 당신 앞에서 누군가가 과시하려고 하면 아주 무섭게 대했다고 한다.


  동양의대로 출강하게 되었을 때에는 內經과 運氣篇을 위주로 강의를 했는데 당시에는 전공별로 교수가 모두 배정이 되어 있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 임상강의도 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과와 오관과도 강의를 하였고 특히 종양치료에 관한 프린트물을 교재로 해서 수업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특히 辨證奇聞이 매우 좋은 임상서적이라고 추천했다고 한다.


  선생은 대한한의사회의 일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지만, 대한한의학회의 일에는 남 못지않은 정성을 쏟았다. 그리하여 대한한의학회의 초대이사 및 대한한의학회의 교육부장을 맡은 것 외에 한의학회지의 기고에도 열심이었고, 한의사회가 주관하는 각종 강좌의 초청에 응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대략 1960년대 초반부터 『宇宙變化의 原理』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여름에 한 달씩 혹은 비정기적으로 계룡산에 숙소를 정해 두고, 매일 아침 시냇물에서 沐浴齋戒를 하고 난 다음에 원고를 정리하였다.

선생은 『宇宙變化의 原理』를 다 쓰고 나서 이 책의 제목을 과연 무엇으로 해야 할지를 놓고 무척이나 고심했던 모양이다. 부인이 곁에서 그 모습을 보다 못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느냐고 물었더니 책은 이제 다 썼는데 제목을 무엇으로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책 내용이 어떤 것이냐고 부인이 질문하자, 선생은 음양오행의 이치와 우주 삼라만상의 변화하는 이치 같은 것이 들어있다고 했고, 부인은 가볍게 툭 던지듯 그러면 '우주변화의 원리'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선생은 무릎을 탁 치며 참 좋은 생각이라고 하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냈느냐고 부인을 칭찬했다고 한다.


  『우주변화의 원리』, 『동의수세보원주석』을 집필하여 출판하고 난 뒤에는 이미 건강이 많이 악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책들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면서 조금 더 수정해서 개정판을 내야한다고 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한결같이 우주변화의 원리가 너무 어려우니 조금 더 쉽게 풀어 줄 수 없느냐고 했지만, 그러면 책의 값어치가 없어진다고 하였다. 당장은 어렵다고 하겠지만, 양의는 올 때까지 왔으니 앞으로는 한방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언젠가는 이 책이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라고 부인과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 외에 또 다른 무언가를 하나 더 책으로 내겠다고 준비를 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봉흠 교수의 말에 의하면 황제내경 해석을 준비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진료(임상)


  선생은 한의원에 따로 간호사도 두지 않고 부인이나 제자들이 약을 싸면서 도왔을 뿐, 대부분 선생 혼자서 한의원을 꾸려 나갔다. 선생에게 배우러 오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 어떤 사람이 와 보고서 하는 말이 그렇게 용하다는데 왜 한의원이 이렇고, 환자도 별로 없고 이런가 하고 말하자, 배우러 온 사람들에게 '돈 벌려거든 오지 마라. 의원질 해서 돈 벌겠다는 그런 생각가지고 있으면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하지, 이걸 하느냐. 한번 잘못한다면 殺人하는게 의원인데.'라고 하였다.


  어떤 젊은 사람이 약을 받아들고 '이거 먹으면 낫습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이에 선생은 '너는 병원에 가서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낫지 않으면 돈을 도로 달라는 말이냐. 어디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 가라!'고 호통을 쳤다. 그런 반면, 약을 지었는데 돈이 없다고 하여 일 돕는 사람들이 난감해 하면, '소위 仁術이라는게, 뭐가 仁術이냐. 약 먹고 살겠다는 사람, 돈 없다고 지어 놓은 약을 그냥 주지 않고 그런 법이 있겠느냐.'라고 하며 약을 지어 그냥 쥐어 보냈다. 나중에 돈을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안 오는 사람도 제법 있어서 주위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돈 없다고 약 안주는 것은 못할 일이야'고 말하였다.


  전문과목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선생은 '특별히 어떤 병을 잘 본다는 것은 다른 것은 모른다는 말이다. 무슨 병을 잘 하고 무엇을 잘 보고하는 것을 쳐다보지 마라. 다른 병보다 그거 좀 낫단 말이고 다른 건 모른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의 처방은 일반적으로 보기에는 너무 과감하고 간결하여 마음 편히 따라 쓰기에는 쉽지 않았다. 송융섭씨의 조카가 설사를 오래하여 양방병원에 다녀도 낫지 않아 선생에게 데리고 온 적이 있었다. 그러자 처방을 써주며 직접 지어가지고 가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부자가 한 돈 반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두 번 다시 물으면 벽력같이 호통 치는 성품을 잘 아는 터라 두 번 묻지 않고 처방대로 약을 지어 와서 가족들에게 이야기 하였더니, 조카의 아버지인 그의 형이 부자는 함부로 쓰면 위험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교수님께서 설마 니 조카 죽으라고 처방 낸 건 아닐 테니 먹여보자.'고 하여 약을 달여 먹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나이의 조카였던 탓에 약을 한꺼번에 먹이지 않고 한 첩을 달여 조금씩 떠 먹였는데, 한 첩 달인 양의 반 정도를 먹일 즈음에 땀을 흠뻑 흘리면서 조카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설사가 완전히 나았다. 또 그런 반면 아주 오랫동안 약을 투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섯 제 이상씩 약을 투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두 첩으로 병을 치유하지 못하면 바로 거기서 한두 제 또는 여섯 제 까지 약을 복용시켰다. 함부로 이렇게 권하면 약을 팔기 위한 것으로 오해를 사기도 쉬운 일이고 환자들이 거부하여 투약할 수 없었겠지만, 선생의 성품과 위엄으로는 그것이 가능했다고 한다.


  한번은 앞서 언급했던 부산의 김기조씨가 한의원으로 내방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오빠인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내던 김기석씨가 腎臟結石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양방병원에서는 수술할 것을 권하여 수술하기 전에 한방으로는 방법이 없나하여 찾아 왔는데, 내용을 들은 선생은 다짜고짜 '왜 수술해. 洋醫 멍텅구리 새끼나 腎臟수술을 하라지. 腎 속의 돌이 뭐야, 金氣지. 거기다 불을 넣으면 다 녹아.'라고 하였다. 그러자 본인도 양방의사였던 김기조씨는 병원에서는 당장 수술을 하라고 하는데 불을 넣으면 녹는다고 하니 신기하게 여기면서도, 죄송하지만 자기와 같이 세브란스 병원에 같이 가자고 청하였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診脈을 하고 난 후, 약을 지어주면서 몰래 먹여 보라고 하였다. 수술날짜가 다되어 갈 즈음에, 김기석씨가 통증이 없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고 난 후에 사진을 다시 한 번 찍어 보자고 했다. 그래서 1주일 후에 X-ray를 찍어 보니 結石이 없어진 것이었다. 그제야 김기석씨가 의사에게 한의사의 약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 의사는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불손한 말투로 당신이 누구냐, 김기석 교수에게 약을 준 사람이냐, 그렇다면 세브란스 병원의 나에게로 와보라고 하자, 선생은 '에이, 요 호로새끼. 엇다 대고 니가 와라 가라야. 결석 하나 고치지 못해서 칼로 째는 백정새끼가 어디다 대고 와라 가라야. 요놈 새끼. 우리 집에 기어와도 내가 너를 대할랑 말랑해. 에이 상놈.'하며 소리치면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나 무작정 양방의사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을 열고 진지한 학문적 토론을 나눌 수 있거나 양방의료의 한계를 인정하고 허심탄회하게 다가오는 사람이면 한방 양방을 가리지 않고 깍듯하게 예우했다.


  한봉흠 교수가 군대에 있을 때, 맹장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이 때도 선생이 약을 써서 이틀 만에 치료했고 그 후에도 속이 냉하여 오는 여러 질환에 부자를 다량으로 투여하는 처방을 과감하게 사용하여 치료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선생은 麝香도 요긴하게 사용했던 것 같다. 한번은 황종안의 친척이 아무 것도 못 넘기고 있다고 와서 처방을 내 달라고 부탁을 하자, 물도 못 넘기고 있다면 사향을 좀 먹이고 그것도 먹을 때 목에 수건을 느슨히 감고 있다가 약을 넘기고 나서는 조이라고 시켰다 한다. 이것은 사향의 기운이 못 올라오게 하는 것이라 했다. 그렇게 사향을 5푼인가 먹고는 툭 터졌다고 한다. 설태훈 씨의 장녀가 홍역을 앓아 앞을 보지 못할 정도였는데 선생이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麝香을 꺼내 주면서 먹여보라 하였는데 그대로 하고 하룻밤 자고 나니 깨끗하게 없어졌다고 했다.


  선생은 앞으로 암 질환이 상당히 문제가 될 것이므로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당신이 스스로 암 환자를 무료 진료하면서 어느 정도 연구하면 이것을 잡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치료 수단으로는 만삭이 되어 누에고치를 만들기 직전의 투명해진 누에와 인삼과 겨우살이가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암이라는 것은 금기 덩어리이기 때문에 이것을 녹이는 것은 오직 이와 같은 불밖에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중금속 해독에는 마늘과 메밀을 사용하라고 이야기 하였는데 나중에 한봉흠 교수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 실험을 의뢰해 본 결과, 그 효능이 탁월했다고 한다.



별세


  63년에 이미 당신 스스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고 돌아기시기 한 해 전인 67년 12월 정도부터는 주위사람들에게 '내가 왜 이러지?' 하며 자신의 건강상태가 좋지 못함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자꾸만 머리가 커지는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이후에 '환한 봄날인데, 볕 좋은 봄날인데 환한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둡냐.'고 하는 등 서서히 죽음을 예감하였다.


  돌아가시던 68년에는 산책을 나가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였다. 당신이 죽고 난 뒤에 가족들의 생계가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 예견하였으며(선생이 죽고 난 뒤에 온 식구가 거지가 되어 거리에 나 앉을 것이라며 대성통곡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선생의 임종 후 가세가 기울고 가족이 흩어지는 시련을 겪었다) 혹시라도 당신의 生日과 生時만 넘기도록 살 수 있다면 회생할 것이나 완전한 건강을 되찾으려면 2, 3년이 걸릴 것이라 하였는데, 아무래도 그날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등,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여러 일들을 미리 내다보았다. 그래서 자구책으로 자신의 생일을 넘기고 오겠노라고 계룡산으로 내려갔었으나, 꿈에 선생의 조모가 나타나 '여기가 어디라고 왔느냐, 빨리 너의 집으로 가거라!'고 소리치는 것을 보고서 그 곳이 머물러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황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제자들에게도 역시 갈 곳이 아니었기에 그랬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한다. 여느 때처럼 계룡산으로 갔다 하면 한달 씩 걸려야 올라오던 선생이 며칠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는데 이때부터 건강히 급격히 악화되었다.


  자신의 生時만 넘기면 된다는 선생의 말에 한봉흠 교수가 그렇다면 양방 치료를 시도해도 되겠느냐는 질문을 했는데 선생은 그것은 결코 안 된다 하였다. 이영자씨에 의하면 당시의 의료기술로는 양방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뇌혈관 이상으로 혼수상태에 빠진지 열흘도 채 안되어 자신이 태어난 날에 태어난 時를 넘기지 못하고 1968년 음력 6월 5일(양력 6월 30일) 새벽, 가족과 제자들의 곁에서 별세하였으니, 이 때 선생의 나이 향년 58세였다. 



* 한동석 선생님의 생애에 관한 상기의 내용(지금 보시는 페이지)은 <韓東錫의 生涯에 관한 硏究 : 권경인 저, 석사학위논문, 대전대학교대학원 한의학과 原典學전공, 2001년>에서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