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속 문명] 2. 올랍얀센 이야기

나의 이름은 올랍 얀센이다. 나는 발틱해의 북쪽 포구에 있는 항해를 주업으로 하는 조그만 러시아 마을 울랴보르 (Uleaborg)에서 태어났다. 비록 보스니아만의 동부 해안가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엄연한 노르웨이인에 속한다. 당시 부모님은 보스니아만에서 고기잡이 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중이었고 내가 태어날 때인 1811년 10월 27일 되는 날, 러시아 마을인 이곳 울라보르에 입항했다.

나의 아버지 옌스 얀센 (Jens Jansen)은 로포튼 섬 가까이의 스칸디나비아 해안에 있는 로드윅 (Rodwig)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결혼 후 나의 외갓집 사람들이 그 도시에 거주하고 있던 관계로 다시 스톡홀름에 정착했다. 그때 내 나이는 일곱 살이었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스칸디나비아 해안을 따라서 고기잡이 여행을 시작했다.

유년기의 나는 책에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졌다. 아홉 살 되던 해 스톡홀름에 있는 사설학교에 배치되어 그곳에서 14세까지 남겨져 교육을 받았다. 그후 나는 아버지와 함께 모든 고기잡이 항해에 동참하여 정기적인 여행을 했다.

나의 아버지는 키가 6피트 3 (1m 90cm)으로 체중은 15스톤(95 kg)이 초과하는 사람이 었으며, 가장 강인한 부류의 전형적인 노르웨이인으로 일찍이 내가 알고 있었던 다른 어떤 남자보다도 더욱 참을성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부드러운 부인의 상냥함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결단력과 의지력은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 나이 열 아홉 살이었을 때 우리는 어부로서의 우리 여행이 마지막임이 판명된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아직은 내 인생이 모두 끝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세상에 공개하게 될 이상한 이야기에 적합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더 심한 모욕과 구금 그리고 고통을 받을까 두려워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책으로 펴내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아버지와 함께 경험한 놀라운 발견들에 대해 아무 이유없이 다만 그 질실을 말했다는 것만으로 나를 구조한 포경선의 선장에 의해 족쇄에 채워졌다. 그러나 이것으로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집을 비운 지 4년 8개월만에 나는 스톡홀름의 집에 도착하였으나 바로 1년 전에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부모님에 의해 남겨진 재산의 소유가 외가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사실만을 단지 알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즉시 내게 소유권이 돌아왔다. 내가 우리 모험에 대한 이야기와 아버지의 끔찍한 죽음에 대한 기억을 잊어가자 모든 것이 한동안은 잘 되어가는 듯했다.

드디어 어느날 나는 그 이야기를 상당한 재력가인 구스타프 오스털린드 ( Gustaf Osterlind)라는 나의 아저씨에게 상세히 털어놓고, 그에게 내가 그 이상한 세계를 향해 또다른 항해를 할수 있도록 원정에 필요한 제반 여건을 뒷받침해 달라고 촉구했다.

처음 나는 그가 내 계획에 호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흥미를 느끼는 듯 우리가 경험한 여행담과 발견한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했던 것처럼 어떤 관리들 앞에 가서 설명하게끔 나를 초대했다.

내 설명이 결론에 이르렀을 때 내가 느낀 실망과 공포를 한번 상상해보라. 어떤 모르는 서류들이 아저씨에 의해 서명되었으며 경고 한마디 없이 나는 체포되어 실망스러운 두려운 정신 병원에 구금되기 위해 급히 내보내졌다.

그곳에서 나는 장장 28년 동안 그 길고도 지루하며 두려운 고통의 세월 속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동안 나는 결코 내가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중단해 본 적이 없으며 부당하게 갇힌 것에 대한 항의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1862년 10월 17일, 마침내 나는 석방되었다. 나의 아저씨는 죽었고 내 젊은 시절의 친구들은 이제 낯선 이방인이 되었다. 실제로 50살을 훌쩍 넘긴 한 사나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단 한명의 친구도 없는 정신이상자는 기록뿐이었다. 나는 당장 생계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상당한 수의 고기잡이배들이 정박되어 있는 항구쪽으로 몸을 향했다. 그리고 일주일 안에 나는 얀 한센 (Yan Hansen) 이라는 어부의 배를 얻어탈 수 있었는데 그는 로포튼 섬까지 장기간의 고기잡이 순항을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여기에서 내 젊은 시절의 항해훈련이 생계를 꾸리는 데 유용하고 가치 있었던 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 항해는 단지 다른 여행들의 시작에 불과했으며 근면함과 경제적인 검소함으로 나는 몇년 내로 내 소유의 고기잡이 범선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 뒤로 27년 동안 나는 어부로 바다를 좇아 다녔으며, 5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마지막 22년은 내 자신을 위해 살았다.

이런한 모든 세월동안 나는 내 업무에 임해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로서, 책들을 가까이 하는 가장 근면한 학생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나갔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와 나 자신에 의해 밝혀진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이미 인생의 말년에도 내가 소유하고 있는 갖가지 기록과 지도들을 어느 누가 보거나 알게 될까봐 늘 두렵다. 지상에서의 나의 인생이 끝날 때, 나는 세상을 밝혀줄 그리고 인류에게 유익하기를 희망하는 갖가지 지도와 기록들을 남기고자 한다. 미칠 것 같은 광기로 가득찼던 내 오랜 구금생활의 기억과 소름끼치는 고뇌, 그리고 수많은 고통들이 너무도 생생해서 내가 그밖의 다른 좋은 기회를 잡는 것을 보장할 수 없었다.

1889년 나는 내 고기잡이배를 팔아 치우면서 남은 여생을 지켜줄 아주 충분한 양의 돈을 축적했음을 발견했다. 그때 나는 미국으로 돌아왔다. 6년간 나의 집은 바타비아 (Batavia) 인근에 있는 일리노이 (Illinois) 주에 있었다.

당시 많은 분량의 책들을 선별해 스톡홀름에서 가져왔음에도 지금 현재 내 사설 도서관에 비치된 대부분의 책들은 그곳에서 다시 모은 것이다. 그후 1901년 3월 4일 이곳 로스앤젤레스 (Los Angeles)에 도착했다. 그날은 맥킨리 (McKinley)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식 날이었으므로 잘 기억하고 있다.

나는 초라한 집 한 채를 샀으며 스스로 직접 기른 덩클나무와 무화과 나무, 그리고 나의 일에 관련된 책들에 의해 보호되어지는 이곳 내 거주지의 은퇴생활 속에서 우리가 발견했던 새로운 세계의 갖가지의 은퇴생활 속에서 우리가 발견했던 새로운 세계의 갖가지 지도와 그림을 그리기로 작정했으며 또한 아버지와 내가 스톡홀름을 떠났을 때로부터 우리가 남극에서 헤어졌던 비극적인 사건 때까지의 이야기를 상세히 쓰기로 결심했다.

나는 우리가 1829년 4월 3일 고기잡이 범선 (Sloop : 외돗배)을 타고 스톡홀름을 떠나 남쪽으로 항해해간 것과 고틀랜드 (Gothland) 섬을 떠나 왼쪽으로, 그리고 욀란드 (Oland) 섬에서는 오른쪽으로 항해했던 것을 잘 기억한다.

수일 뒤 우리는 샌드홈마 포인드 (Sandhommar Point) 를 성공리에 회항하여 스칸디나비아 해안으로부터 덴마크를 가르는 좁은 해협을 통해 순항했다. 머지않아 우리는 크리스찬샌드 (Christiansand) 라는 마을에 입항했는데 그곳에서 이틀간 휴식을 취했고, 그 다음 로포튼섬을 향해 서쪽으로 스칸디나비아 해안을 따라 출발했다.

나의 아버지는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였는데 그것은 자난번에 잡은 어획고를 스칸디나비아 해안을 따라 산재한 어촌들에 파는 대신, 스톡홀름 시장에 내다 판 것에 의해 그가 받았던 훌륭하고 만족할 만한 보상 때문이었다.

그는 특별히 그 이전 해에 있었던 여러 북방 순항 중에 프란츠 요제프 (Franz Joseph) 의 서쪽 해안에서 발견했던 약간의 코끼리 상아를 내다 판 것에 만족스러워 했다. 그는 이번에도 운이 좋아 우리가 또다시 대구와 청어, 고등어, 연어 대신 조그마한 고기잡이 범선에 상아를 충분히 가득 싣게 될 희망을 나타냈다.

우리는 위도 71도 40분인 함메르페스트 (Hammerfest)에 입항하여 며칠간 휴식을 취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식량과 몇 개의 식수용 물통을 공급받는 상태로 일주일간 체류했다. 그리고 나서 스피츠베르겐을 향해 출항했다.

처음 며칠은 탁트인 외해를 볼 수 있었고 기분좋은 바람을 만났다. 그러고나서 우리는 많은 양의 얼음과 빙산들을 마주쳤다. 우리의 조그마한 외돛배보다 큰 배가 미로같은 빙산 사이를 이리저리 헤치고 나아가거나 또는 겨우 열린 수로를 비집고 나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들 괴물 빙산들은 수정궁전들, 거대한 성당과 환상적인 산맥들, 엄하게 보초서는 형상, 높이 치속은 견고한 바위절벽, 조용히 침묵하고 서 있는 스핑크스, 물결이 이는 끊임없는 파도들에 저항하는 모습 등을 다양하게 보여주었다.

많은 구사일생의 탈출들 후에 우리는 6월 23일 스피츠베르겐에 도착하여 위야드 (Wijada) 항에 잠깐 정박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아주 성공적인 어획고를 올렸다. 그뒤 다시 닻을 오리고 흰로펜 (Hinlopen)해협을 통해 출항하여 북동부의 내륙을 따라 연안을 항해했다.

강한 바람이 남서부로부터 불어왔는데, 아버지는 그것을 이용하여 프란츠 요제프에 도착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했다. 그곳은 바로 전 해에 우연히 스톡홀름의 시장에서 상당한 판매고를 올려 준 상아엄니를 발견했던 곳이다. 또한 아드레 (Andree)가 스피츠베르겐의 북서 해안으로부터 그의 운명적인 기구 항해를 출발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는 결코 그 이전이나 이후로 그렇게까지 많은 해초를 본 적이 없다. 그것들은 너무 수가 많아서 해안가에 있는 바위들을 가리는가 하면 하늘을 어둡게 뒤덮을 정도였다.

며칠 동안 우리는 프란츠 요제프의 바위 해안선을 따라 항해했다. 마침내 순풍이 불어와 우리가 서부 해안으로 항해하는 것은 순탄했다. 그리고 24시간의 항해 뒤에 우리는 한 아름다운 곳에 도착했다. 그곳이 먼 북극 땅이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곳은 초목이 자라 푸르렀으며 대기는 따뜻하고 잔잔했다. 또한 멕시코만류의 영향이 가장 예리하게 느껴지는 지점에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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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해안에는 수많은 빙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있는 이곳은 수로가 뚫려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서쪽 멀리에는 거대하게 떠 있는 빙하군들이 있었으며 서쪽으로 더 멀리 가면 빙하가 낮은 언덕의 산맥처럼 보였다. 우리 앞에 그리고 곧 바로 북쪽으로는 탁트인 외해가 놓여 있었다.

존 배로우 경 (Sir John Barrow) 은 북극 지역 내에서의 발견과 조사의 항해란 제목이 붙여진 그의 작품 57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이치 (Mr. Beechey)씨는 자주 발견되어지고 주목되어지곤 했던 스피츠베르겐 서부해안의 온도가 온화함을 언급한다. 그곳에서 비록 온도계가 단지 빙점 위 몇 도를 지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춥다는 기분이 거의 없다. 청명한 날의 눈부시고 생생한 색채 배합, 맑은 하늘에 태양이 곧장 내려 쪼일 때 그것의 푸른 색조는 너무도 강렬해서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탈리아의 하늘과도 견줄 수 없다."

나의 아버지는 오딘과 토르의 열렬한 신자였다. 그래서 자주 내게 그들은 삭풍 (북풍)너머 멀리에서 온 신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통이 있다고 했다.

훨씬 먼 북족 저 너머에는 죽을 운명으로 태어난 우리 인간들이 일찍이 알고 있었던 그 어느것 보다 훨씬 아름다운 땅이 있으며 그 곳에는 선택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케인 (Kane)선장은 12월26일 월요일 자 모턴스 저널 (Mortons Journal) 299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보기에 통행할 수 있는 수로는, 때때로 부수어진 얼음이 그들을 갈라놓는 것과 함께 15마일 (24km)또는 그보다 조금 넓다. 그러나 그것은 조그마한 얼음조각이어서 나는 마치 북쪽을 향한 우리의 눈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듯이 북쪽에 있는 열린 공간으로 배가 항해함에 따라 그것이 안보이게 처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젊은 시절의 상상력은 열정, 열성 그리고 아버지의 종교적인 열렬함으로부터 불당겨졌다. 나는 외쳤다. "왜 이 좋은 땅으로 항해 않는냐? 하늘은 맑게 개었고 바람은 순풍이며 바다는 열려 있다."

우리는 야곱 그림 (Jakob Grimm)이 집필한 독일의 신화 (Deutsche Mythologie)778쪽에 있는 다음 글을 인용한다.

"보올(Bor)의 아들들이 우주의 중앙에 아스가르드 (Asgard)라 불리는 도시를 건설했다. 그곳에는 그 신들과 그들의 친족들이 거주한다. 그리고 거주지로부터 지구 위와 그보다 위에 있는 하늘 안에 아주 많은 놀랄 만한 것들을 계획한다. 그 도시 안에는 흘리스크알프 (Hlidskjalf)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오딘이 그곳의 높은 옥좌 위에 앉아서 모든 세계를 굽어보며 모든 인간들의 행위를 식별한다.

지금까지도 나는 아버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릴 때 그의 표정 뒤에 스며 있던 "유쾌한 놀람"의 표정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묻기를 "내 아들아, 나와 함께 일찍이 사람들이 모험했던 곳보다 더 멀리 가서 탐험하지 않으련?"

나는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오딘 신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기를..."

그리고 재빠르게 돛을 조정하고 나침반을 흘끗 보더니 개방된 수로를 통해 정복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이리하여 우리의 항해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홀 (Hall)은 288쪽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월 23일에 두 명의 뱃사람을 동반한 두 에스키모인이 케이프 럽톤 (Cape Lupton)에 갔다. 그들은 그들의 눈길이 미칠 수 있는 최대한 멀리까지 펼쳐진, 물길이 열린 바닷길이 있다고 보고했다.

마치 아직도 초여름인 것처럼 태양은 수평선 안에 낮게 드리워졌다. 실로 우리는 얼어붙은 밤이 다시 닫히기 전 우리 앞에 도래한 거의 4개월간의 낮 시간대를 가졌다. 우리의 조그마한 고기잡이배는 마치 우리들 자신이 모험을 열망하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36시간 안에 프란츠 요제프 땅의 해안선에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이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우리는 북동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힘찬 조류 속에 놓여 있는 듯했다. 우리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더 먼 곳에는 빙산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조그마한 범선은 내로해협을 밀고 나아갔으며 수로들을 빠져나가 외해로 진입했다. 그곳의 수로는 너무 좁아서 만일 우리가 탄 배가 조금만 더 컸어도 우리는 결코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3일째 되던 날 우리는 어떤 섬에 왔다. 그곳의 해안가는 외해에 씻겨 침식되어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상륙해서 하룻 동안 탐험하기를 결정했다. 이 새로운 땅에는 숲이 없었으나 우리는 북쪽 해안 위에 떠 있는 아주 큰 부복의 축적물을 보았다. 몇몇 나무들의 몸체는 길이가 40피트 (12m)에 직경이 2피트(60cm)였다. 그릴리 (Greely)는 1권 100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병사 카널 (Connel)과 프레데릭 (Frederick)이 최고 한계수위 흔적이 있는 바로 위 해변에서 아주 큰 구과 (침엽수과) 나무를 발견했다. 그것은 둘레가 거의 30인치 (76cm) 였으며 길이가 약 30피트 (9m)였는데 2년 이내의 조류에 의해 그 지점으로 옮겨졌음이 분명했다. 그것의 일부는 땔감으로 잘려졌으며 그 계곡에서 처음으로, 밝고 명랑한 모닥불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하룻동안 이 섬의 해안선을 탐험한 뒤 우리는 닻을 올리고 뱃머리를 외해에 있는 북쪽으로 돌렸다. 나는 나의 아버지와 나 자신 그외 누구도 거의 서른 시간 동안 아무 음식도 맛보지 않았음을 기억한다.

아마 이것은 나의 아버지가 말한, 일찍이 이전에 그 어느 누가 가본 것보다도 더욱 멀리 북족 바다로 향한 우리의 이상한 항해에 대한 긴장과 흥분때문이었다. 활동적인 정신성이 실제적으로 필요한 요구들을 무디게 했었다.

캐인 (Kane)박사는 그의 작품 379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무엇이 얼음이 되는지 상상할 수 없다. 세찬 조류가 끊임없이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내가 해발 500피트 (1.000m)보다 더 놓은 곳에서 본 것은 좁은 얼음띠뿐이었다. 단지 10에서 15마일 (16~24Km) 폭으로 뚫려진 넓은 공간의 수로와 함께 있는 좁고 긴 얼음만을 보았다. 그러므로 북쪽으로 나 있는 확보된 공간을 헤치고 나아가야만 하거나 아니면 그 얼음을 녹여야만 하든지 했다" .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춥기는 했지만 무척 긴장했기 때문에, 약 6주일 전에 노르웨이 북쪽 해안의 함메르페스트에 머물 때보다도 날씨는 실로 더욱 포근하고 쾌적하게 느겨졌다.

피어리 선장의 두 번째 항해는 결빙되지 않은 외해가 극지방 또는 극지방 가까이 존재한다고 몇몇에 의해 오랫동안 주장되어진 추측을 확인시켜 주는 또다른 상황을 설명해 준다. 피어리는 말한다.

"거세어진 바람이 한밤중에 전에 온도계를 5도까지 낮추었다. 이에 반해 멜빌 (Melville) 섬에서 오는 바람은 일반적으로 낮은 온도에서 온도계의 동시적인 상승을 동반한다."

그는 묻는다.

"이것은 아마 바람이 처음 불기 시작한 저멀리 외해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야기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아마 극지방이나 극지방 가까이에 외해가 존재한다는 의견을 확인시켜 주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둘 다 매우 시장기를 느끼고 있음을 솔직히 시인했다. 나는 잘 저장되어 있는 식료품실로부터 즉시 실속있는 식사를 준비했다. 음식을 남기없이 실컷 먹고 나자, 아주 나른함을 느끼게 됐고 아버지에게 자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대답했다.

'좋아, 내가 불침번을 서겠다."

나는 얼마나 오래 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범선 안에서의 격렬한 동요에 놀라 깨어났다는 것뿐이다. 놀랍게도 아버지가 푹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에게 힘찬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그는 놀라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일 아버지가 그 순간 배 난간의 가로대를 즉석에서 붙잡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격노한 파도 속으로 던져졌을 것이다.

거센 눈보라가 맹위를 떨쳤다. 바람이 배 위로 직접 불어와 우리의 범선을 놀랄만한 속도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내 우리를 전보시키고자 위협하고 있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이 돛들을 즉시 내려야만 했다. 우리의 배는 격동 속에서 몸부림쳤다. 우리가 아는 몇 개의 빙하들이 양쪽에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수로는 북쪽으로 곧바로 열려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내내 그래 줄까?

우리 앞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에워싸고 있는 마치 물의 가장자리에 떠 있는 이집트의 밤처럼 아둠침침한 수평선은 증기가 많이 서린 안개 또는 그보다 좀 옅은 연무였는데, 꼭대기 쪽으로 증기구름같은 하얀 것이, 떨어져 내리는 크고 하얀 눈 조각과 섞여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단단해 보이면서도 깨지기 쉬운 얼음을 둘러싸고 있든, 또는 그것이 우리의 조그마한 범선이 돌진해 들어가 우리를 빠져 죽게 만들지 모를 약간의 숨겨진 장애물을 둘러싸고 있든, 그것이 단지 극지방의 안개 현상에 불과했든 아무튼 그것에 대해서 무어라 단정지를 단서가 없었다.

홀 (Hall)은 그의 작품 284쪽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프라비던스 (Providence) 빙산의 정상으로부터 짙은 안개가 물의 징조를 보이는 북쪽으로 피어올랐다. 오전 10시에 크루거 (Kruger), 니드만 (Nindmann), 하비 (Hobby) 등 세 사람이 물길이 트인 범위를 확인하기 위해 케이프 루프로 (Cape Lupro)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소수의 물길이 열린 공간과 만들어진 지 채 하루도 안돼 그 위에 얼음조각들을 던지면 쉽게 깨질 정도로 가는 아주 엷은 살얼음을 보고했다."

도대체 어떤 기적에 의해 우리가 완전한 파괴로 운명지어질 무모한 돌진으로부터 탈출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우리의 작은 범선이 마치 그것의 이음새가 부수어지고 있는 것처럼 심하게 찌걱거리고 삐걱거린 것을 기억한다. 배가 소용돌이 조류 혹은 큰 돌개물살의 집어삼킬듯한 격류에 의해 몹시 긴장한 채 앞뒤로 흔들거리고 휘청거렸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미리 긴 나사못으로 나침반을 대들보에 고정시켜 놓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양식들은 내동댕이쳐져 나뒹굴어 요리실이 있는 선실의 갑판으로 부터 휩쓸려 나갔다. 만일 우리 스스로를 돛대에 단단히 묶는 예방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 심하게 요동치는 바닷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을 것이 틀림없다.

격노한 파도로 인해 귀청이 터질 듯이 멍멍한 소동 너머로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외쳤다. "용기를 가져라, 내 아들아, 오딘은 바다의 신이며 용기있는 사람의 반려자이다. 그가 우리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 마라."

나에게 그 말은 마치 끔찍한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탈출할 가능성이 없다는 듯이 들렸다.

작은 범선은 지금 바닷물을 채우고 있는 중이었다. 눈은 앞이 안보일 정도로 빠르게 내리고 있었으며, 파도는 앞뒤 안가리고 허옇게 분무되는 격노 속에서 우리를 뒤집어 넘어뜨렸다.

어느 순간에 우리가 표류하는 거대한 빙하군과 충돌하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무시무시하게 굽이치는 큰 파도가 산 만한 파도의 정상으로 끌어올려지는 듯 싶더니, 마치 우리의 고기잡이 범선이 깨지기 쉬운 선체이기나 한듯이 우리를 곧장 직통으로 바다 깊숙한 곳으로 던져 넣었다.

실제 벽과 같으며 거대한 하얀 뚜껑을 덮어쓴 파도가 우리의 이물 (뱃머리)과 고물 (뱃후미)을 무시무시하게 에워샀다. 시련은 이름없는 긴장의 공포, 묘사할 수 없는 두려움의 고뇌와 함께 세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 내내 우리는 격렬한 속도로 앞으로 끌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마치 그런 광란의 노력들에 대해 싫증이 나기 시작한 듯 바람은 그의 광기를 줄이기 시작하여 점차 소멸되어 사라졌다. 마침내 우리는 완전한 평온을 되찾았다. 연무가 사라졌으며 오른쪽으로 멀리 펼쳐져 있는 몇몇 빙하와 왼쪽으로 간간이 보이는 작은 군도들 사이로 폭이 10~15마일 정도 되는 결빙되지 않은 수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말할 때까지 조용히 남아 있기로 결정하고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주목해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는 허리로부터 로프를 풀고 아무 말없이 다행히도 손상되지 않은 펌프로 그 미치광이 폭풍이 범선 안에 가득 채운 물을 덜어내기 위해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기잡이 투망을 던지듯 아주 조용히 범선의 돛을 올렸다. 그러고 나서 순풍이 불어오면 우리는 그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용기와 집요, 불굴의 끈기는 실로 비범한 것이었다.

상황을 점검하자 남아있는 양식이 반도 채 안되게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실망한 틈도 없이 우리는 또 배가 격렬하게 내던져지는 동안 소중한 물통이 배 밖으로 휩쓸려 나갔던 것을 발견했다. 두 개의 물통이 주요 은신처에 있었으나 둘다 모두 텅비어 있었다. 우리는 아주 공평하게 음식을 나누었지만 신신한 물은 공급받지 못했다.

나는 갑자기 우리가 처한 위치에 대한 두려움을 깨달았다. 곧 갈증이 엄습했다. 아버지께서 말했다.

"정말 고약하구나, 온몸이 흠뻑 젖었으니... 더러워진 옷을 말려야겠다. 오딘 신을 믿고 희망을 잃지 말자, 내 아들아."

그런데 우리는 마치 우리가 북극에 와 있지 않고 어떤 남쪽지방의 위도에 와 있는 것 같이 태양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넘어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태양은 주위에 흔들거리고 있었으며 그것의 궤도는 항상 보였고, 날마다 점점 더 놓이 떠 올라 자주 안개로 뒤덮였다.

그것은 아직도 항상 신비한 북극의 땅을 지키며 마치 남자의 희롱을 질투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다소 안달해 하는 비운의 눈동자같이 구름으로 된 속이 비치는 레이스 자락을 통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 우리의 오른쪽으로 빙하의 프리즘을 장식하는 광선들이 현란하게 빛났다.

그들의 반사광들은 석류석, 다이아몬드, 사파이어의 섬광들도 방시되었다. 셀 수 없는 색깔들과 형상들의 화려한 파노라마, 아래로 녹색 색조의 바다가 보이는 동안 위로는 자줏빛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